
남해
소REcord
가천다랭이 마을을 가다.

다랭이 마을 티켓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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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내에서 남면사무소까지 성훈이 태워준 덕에
가천 다랭이 마을까지는 한 번의 버스로 갈 수 있었다.
다랭이 마을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두 군데나 있어
실수하게 될까, 지나가는 어르신에게 여쭤보았더니
'중앙할인마트'에서 표를 사면 된다고 하셨다.
응? 표? 관광지라 꼭 발권해야만 갈 수 있는 곳인가?
물과 초코바도 살 겸 현금을 뽑고 마트로 향했다.
"사장님, 다랭이 마을 갈 때는 표를 꼭 사야 하나요?"
"아니, 카드도 되는데 우리는 아직 표를 팔아.
사는 사람이 있어서."
"누가 사나요?"
"아직 나이 많은 분들이 사시지.
남해에서 다랭이 표 파는 데는 우리밖에 없어요."
"그럼 저 한 장 주세요!"
사장님은 바로 넘버링이 되어있는 노란 티켓에
날짜와 요금을 써서 찢어주셨다.
나는 고향에서도 버스를 이용한 적이 없어서인지
수기 티켓이 참 신기하고 예뻐 구겨지지 않게 조심했다.
이제 건너편 정류장으로 건너가 버스만 타면 되는데
3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단다.
창문 없는 정류장 부스가 너무 숨 막혀 보였던 나는
그늘 진 가게 앞 마루를 가리키며 물었다.
"사장님, 저 여기서 쉬고 가도 돼요?"
"그럼. 차 올 때까지 더위 식히고 천천히 가도 돼요.
더 놀다 가."
사장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마루에 앉아 모자를 벗었다.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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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보려면 오른쪽 좌석에 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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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오르니 여행이 시작되는 느낌이 와닿았다.
손님은 나를 포함, 2명뿐이었다.
마트 사장님이 바다를 보고 싶으면 오른쪽에 타라고
미리 알려주셔서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버스가 산을 오를 때마다 시야에 바다가 가득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남해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그렇게 높은 곳에서 바다를 본 일은 처음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바다는 내가 남해에 가장 오고 싶은 이유였다.
어려서는 산과 논, 커서는 빌딩 숲만 보고 자라
바다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 생긴 것이다.
광활, 이란 단어 외에는 그 풍경을 설명할 수가 없다.
1초도 놓치지 않고 눈에 그대로 담아가고 싶어
창문에 거의 코를 박고 내릴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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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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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프로젝트 첫 녹음지에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내린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사진에서 본 다랭이가 펼쳐질 줄 알았더니
덩그러니 정류장과 다랭이 마을 안내판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다랭이를 보고 보리암으로 넘어가는 코스를 짰던 나는 다랭이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다랭이가 안 보이니 당황스러워 고개만 휙휙 돌리고 있는데,
"기사님, 제가 이따가 상주로 가야 하는데 여기서 버스가 몇 시에 출발하나요?"
나와 같이 내린 여성분이 기사님에게 버스 시간표를 여쭙고 있었다.
나도 스을쩍 곁으로 다가가 기사님께 눈빛을 보냈다.
남해의 농어촌 버스는 보는 법이 어려워
나도 출발 시간과 보리암으로 가는 버스를 여쭤봐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출발은 4시 버스를 타면 되고,
상주는 여기, 이동으로 가는 버스, 이거를 타고
4시에 여기서 탄다카면 이 시간대,
이거를 타면 상주로 갈 수 있어요.
이해됐어요?"
기사님은 손수 시간표를 짚어가며 상주로 가는 법을 알려주셨다.
여성분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나도 잽싸게 물었다.
"기사님, 그럼 보리암은 몇 시, 어디서 타면 돼요?"
"보리암은 그다음에 이거, 상주 가는 거 말고 이거, 오케이?"
"음... 오케이..! 감사합니다..!"
오케이는 무슨.
절반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더 묻고 싶었지만 기사님이 가셔야 했기에
더 붙잡을 수 없어 알아듣는 척을 했다.
곧 버스는 가고
다랭이는 안 보이고
일단 4시까지 돌아오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안내판을 보러 가는데
먼저 시간표를 물었던 여성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혹시 혼자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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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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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경과 만나게 되었다.
진경은 전라도 광주에서 온 대학생으로,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진경은 내 손에 들린 녹음기를 보고
"혹시 사운드 관련 일하는 분이세요?"
라고 물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사레를 쳤다.
"어쩌다보니 제가 녹음기를 갖게 돼서
6주살러에서 하는 개인 프로젝트로
남해의 소리를 녹음하고 있어요."
"우와, 저 이런 거 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녹음 이런 거. 너무 특이하고 신기해요."
"앗, 아니에요! 저도 처음해보는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일 아니에요!"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녹음기 하나로 그런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부끄러웠다.
나는 얼른 진경을 제촉해 다랭이 마을을 둘러보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한 시간뿐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길을 잘못 들어 마을 위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 진경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곳에서
그 유명한 다랭이 마을의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마 그때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끝까지 다랭이 마을의 전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평일의 한적한 마을을 걸어 내려갔다.
게스트하우스도 몇 곳 있었는데 조금 의아했던 것이,
논 뿐인 이 마을에서 숙박을? 굳이? 였다.
하지만 있는 줄도 몰랐던, 바다로 내려가는 길을 보고,
그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암석해변과 수평선을 보고 납득이 되었다.
그 더위에도 흥분이 되어
"진경쓰! 전 먼저 내려갈게요!
내려가서 녹음하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요!"
하고 빠르게 데크를 내려갔다.
쪽빛바다.
하늘을 녹여 그대로 바다로 흘려내린 듯한 바다와
암석을 치고 흩어지는 파도가 눈 앞이었다.
녹음 소리가 어떻게 될 지는 솔직히 뒷전이었다.
잠깐 테스트만 들어보고 그대로 설치한 뒤
나는 암석을 성큼성큼 건너 다녔다.
바다가 좋아.
파도가 좋아.
비록 수영을 하지 못해도
물고기를 만지지 못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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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실컷 보고 우리는 차 시간이 다 되어 마을을 올랐다.
방금 바다를 보고 차오른 마음이 무색하게
땀에 젖어 헉헉대며 다음 코스인 보리암을 포기해야하나, 생각했다.
이동면에서 헤어지게 될 우리는 버스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 뻔 했다.
남해의 버스는 정류장 안내 방송이 나오는 버스도,
나오지 않는 버스도 있는데 우리가 탄 것은 후자였다.
기사님께 이동에서 내리려면
얼마나 기다려야하느냐고 여쭤보았더니
손가락으로 문 밖을 가리키셨다. 여기였다.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겨 내렸다.
그리고 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각자의 버스를 기다렸다.
이름 외에 전화번호나 SNS 계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반나절의 반가운 인연으로 끝맺음 짓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경에게 부담이 될 것 같기도 했고.
버스 도착 전광판을 보고 있는데
진경이 입을 열었다.
"언니가 없었으면
전 오늘 숙소에 가지 못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언니."
나도.
나도 고마웠어, 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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